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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작고하신 저의 부친께서 하루는 자켓에 늑대와 한 소년(피터)이 그려진 앨범 1장을 보여 주시며 “이것도 동화란다.” 하시고 들려주신 음악이 프로코피에프의 “피터와 늑대” 였습니다. 플루트 그림을 보여 주시면서 “이 소리는 새소리인데 이렇게 생긴 악기가 만드는 소리란다.” 그리고 클라리넷 그림을 보여 주시며 “이것은 클라리넷이라는 악기인데 고양이 소리 같지?…” 이 음반을 부친과 함께 수없이 들으면서 악기에 대한 이해와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기 위한 준비를 했던 셈입니다. 그 후 어떤 작품을 듣던지 악기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게 되었고 악기가 각 작품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가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때 부친께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던 내용을 늘 떠올리곤 했지요. 그래서 프로코피에프라는 작곡가는 지금도 친근하고 참 좋은 느낌으로 제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소련(지금의 러시아)이라고 하면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포스터를 교실에 걸어놓는 등 반공을 국시로 하던 학교 교육에서는 무조건 적이고 경계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든 사람이 바로 거기 출신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었지요. 한참 시간이 흘러 이념의 다양성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프로코피에프와 그의 작품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릴 때 가졌던 의문을 다소나마 해소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코피에프는 20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여타 러시아나 동구권 작곡가들이 보여주는 상징적이고 차가운 어두움의 그림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에서 완벽하게 벗어난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작품에는 서구적인 화려함과 다양성이 작품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그의 작품 경향은 그의 행적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14세 소년 프로코피에프는 글라주노프의 추천으로 상트 페테스부르크 콘서바토리움에 입학하게 되며 그 곳에서 또 한 사람의 러시아 출신 거장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알렉산더 빈클러(A. Winkler)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게 됩니다. 1914년 그가 이 콘서바토리움을 졸업할 때에는 그의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인정 받아 “안톤 루빈스타인” 상도 수상하게 됩니다. 그 후 조국 러시아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등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자 마침내 1918년 미국으로의 망명을 하게 되고 이 당시 미국과 프랑스를 무대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연주 활동도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귀소본능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조국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그는 조국 러시아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러나 러시아 출신 비평들로부터 개성없는 맹물 예술가라는 혹평도 받는가 하면 서구로부터 온 이단자라고 취급되어 따돌림까지 받게 됩니다. 제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소개할 때 잠깐 언급했던 “증언”에서 프로코피에프를 “타락한 천재”라고까지 몰아 부쳤지요. 진정 프로코피에프가 쇼스타코비치의 주장대로 색깔이 불분명한 “회색인”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그는, 자신만의 특유한 현대적 감각과 조화된 높은 예술성을 지닌 작품들로 우리 곁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가 러시아로 돌아온 직후 만들었다는 “피터와 늑대”도 프랑스적인 풍자와 미국적인 묘사가 잘 어울어지는 작품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교향곡 제 1번 D장조, 작품 25 “고전(Classical)”>
프로코피에프가 상트 페테스부르크 콘서바토리움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이 1번 작곡을 시작하고 조국 러시아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1917년에 완성한 곡입니다. “1917년” 하면 떠오르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는데 부제인 “고전”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프로코피에프는 이 1번을 두고 모짜르트나 하이든이 20세기에 쓸법한 교향곡이라고 자칭했다지요. 따라서 이 작품은 그늘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지극히 밝고 화려한 고전적 교향곡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리잡고 있는 그만의 역설을 유추해 보시길 바랍니다.
* 최선
샤를르 뒤뜨와/몬트리얼 심포니/Decca – Decca의 녹음은 최고에서 항상 반발짝 물러서 있는데 마치 침묵하면서 우뚝 서있는 영국 신사 같기도 하지요. 약간은 모자란 듯 하면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는 그런 녹음이니 말입니다. 프로코피에프의 1번은 곡의 성격상 밝지만 그 이면에 남겨진 여운을 잘 이끌어내야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뒤뜨와의 1번 해석은 리듬을 탄 감정 조절의 승리가 아닐까 합니다. 아바도의 너무 밝고 화사하기만 연주나 “너 이렇게 짤 수 있어?”하고 완벽한 구성을 드러내 놓고 뽐내는 카라얀의 연주와는 대조적으로 뒤뜨와는 묵묵히 듣는 사람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남깁니다. 2악장의 격조높은 아름다움을 보십시요. 뜬구름의 화사함이 아니라 살포시 내려앉은 공작이 펼친, 화려하게 수놓은 날개 같습니다. 피날레에서도 잊지않고 도입부의 메시지에 훌륭한 답을 하고 있지요. 꼭꼭 씹으며 들을 수 있는 호연이며 커플링 되어있는 5번도 가슴 벅찬 감동을 남기고 있습니다.
* 차선
오퍼스 챔버/DG – 선장 없는 배가 표류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집어든 CD 한 장이 플레이어에 거는 순간, 이런 노파심을 한 순간에 날려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화음이 나올까 하는 의구심이 갈 정도이지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추운 겨울, 추위에 아랑곳 않고 얼음을 지치며 노는 명랑하고 떠들썩한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느린 악장에서는 뒤뜨와가 보여준 성숙한 아름다움의 매혹적인 모습이 아니라,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검정머리 곧게 내려 빗은 티없이 맑은 어린 소녀 하나가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웃음짓는 그런 깨끗함이 곡을 조심스레 감싸고 있습니다. 녹음도 스피커에 뺨을 들이대고 듣는 착각을 정도로 깨끗하여 이 음반을 더욱 값어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음반을 들으면서 늘, 그 옛날 쿠세비츠키가 오늘날의 진보된 녹음 기술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빠져들곤 합니다.
<교향곡 제 2번 D 단조, 작품 40>
1번 교향곡을 완성한 다음해인 1918년 마침내 프로코피에프는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 파리에서 주로 거주하며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14년의 세월을 동시대의 거장인 스트라빈스키나 화가 피카소 등과 교분을 쌓으며 예술가로서의 안목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프로코피에프의 2번 교향곡은 그가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1924년 집필을 시작하여 1925년에 완성한 곡인데 작품의 구성이 이전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2악장의 “테마와 변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 39번인 5중주곡의 스타일과 흡사하며 또한 1악장은 슈만의 칸타타를 듣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입니다.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작품 111을 기본 구성으로 압축하여 단 2악장으로 곡을 마무리 짓고 있는데요. 피아노가 그의 장기이기도 하지만 그의 피아노 작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관점에 따라선 아주 난해한 작품일 수도 있지만 그의 행적과 그 당시 상황 등을 짚어본다면 이해가 갑니다. 입체파의 대표 거장 피카소를 보십시요. 큐비즘이라는 미술사의 큰 획을 긋고도 1차 대전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그의 붓을 또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 최선
테오도르 쿠차르/국립 우크라이나 심포니/Naxos – “쇠와 강철”의 의미를 내세운 프로코피에프의 2번은 소스라치게 냉혹한 현실을 나타낸 것일까요? 1악장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차없이 의문의 씨앗을 잘라내 버리고 곡을 일으켜 세우는데요. 2악장은 또 어떻습니까? 변주의 극한을 이끌어 냅니다. 광포한 관악의 절규를 우뢰와 같이 성난 드럼이 매정하게 삼켜 버리는 부분에서는 소름 돋는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드는데 여러분들의 소중한 스피커 엣지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 차선
로제스트벤스키/소련국립방송/Melodiya – 전위 예술의 한 토막을 보는 듯한 2번에서 로제스트벤스키는 시커먼 먹구름을 하나 둘 모아서 폭풍우를 만들어 버립니다. 몰아치는 1악장의 긴장, 그리고 서슬 퍼렇게 돋아 있는 날로 난도질 해버리는 2악장의 몸부림은 너무나 리얼하지요. 예르비가 보여준 무게가 조금만 더 보태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면 어느새 곡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향곡 제 3번 C 단조, 작품 44>
3번은 1925년 완성된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The Fiery Angel (불의 천사)”의 교향곡 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제를 이 오페라에서 따왔을 뿐만 아니라 일부의 묘사는 오히려 오페라보다도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줄곧 히스테리를 부리는 주인공의 엉뚱한 행동에 이리저리 채이다 보면 오페라를 다 듣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멍하게 만들지요. 그러나 무언의 오페라 3번은 듣는 사람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니 한결 낫지 않습니까? 이 3번의 탄생 배경은 특이합니다. 프로코피에프는 1927년과 1928년의 두 해 동안 이어졌던 베를린의 오페라 축제에서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오페라 “The Fiery Angel”는 결국 막을 올리지 못했고 1928년 파리에서는 쿠세피츠키에 의해 2막만이 올려집니다만 이에 만족할 수 없었고, 지쳐버린 프로코피에프는 바로 그 해 엉뚱하게도 이 작품을 배경으로 교향곡을 쓰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생전에 사연 많았던 이 오페라의 막을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요. “The Fiery Angel”은 중세 신화 이야기인데 3번 교향곡에서는 주인공 “Renata”의 신들린 움직임을 시작으로 수녀원의 엄숙함이 현과 플루트로 이어지고 휘몰아치는 현악기들의 응집은 “Renata”의 마술을 실감나게 묘사하며 피날레에서는 “Renata”가 가슴에 품고 있던 슬픔과 고통을 금관 악기들의 어울림으로 불태우고 있습니다.
* 최선
무티/필라델피아/Philips – 무티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 뛰어난 프레이징으로 이 곡의 하일라이트 4악장과 5악장의 훌륭한 매칭에 성공했음에도 베스트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어두움”을 아주 조금 오버하여 밝게 끌어내버린, 미세한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코피에프의 3번에서도 이런 아쉬움이 고개를 듭니다. 필라델피아의 색깔 때문일까 하는 의문도 지울 수가 없구요. 무티의 필라델피아는 프로코피에프의 3번에서 예르비를 떠올리며 무티와 예르비를 섞어 놓은 연주를 열심히 찾게 만들었지만 저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자와, 웰러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 등은 무티와 친해지려고도 하지 않으니 말이지요. 이런 사소한 불만에 눈을 감고 무티의 해석에 다가서면 무시무시한 분위기로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 당하는 전율을 느끼게 해 줍니다. 또박또박 짚어내는 필라델피아의 극명한 음의 대비는 눈이 시릴 정도구요. 1악장의 클라이막스에 다소 익살스럽기까지 한 행진곡을 뒤로하고 2악장에 들어서면서 침묵하나 싶더니 3악장에서는 총총걸음으로 위기로 다가섬을 예고하다가 피날레에서는 필라델피아의 금관들이 보란듯이 악마가 실제로 목을 조는 듯한 숨막힘을 표현해 냅니다. Philips로서는 드물게 깔끔한 녹음도 이 음반의 가치를 잘 살려주고 있습니다.
* 차선
월터 웰러/런던필/Decca –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고 콘드라신이 보여주었던 악마의 광포함 같은 것을 보여주었던 3번을 연상시키는 연주입니다. 런던필이 과연 가능할까? 기대와는 달리 웰러는 프로코피에프의 여타 교향곡들의 해석에서 너무 곧고 정직하기만 들렸는데 이 3번에서 웰러가 보여주는 피날레는 눈을 번쩍 뜨게 합니다. 씩씩거리며 내뱉는 악마의 거친 숨소리가 몸에 와 닿는 듯 하지요. 전체를 잇는 곡의 흐름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고 클라이막스를 숨죽이고 바라보게 만드는 현실감 넘치는 해석입니다.
<교향곡 제 4번 C 장조, 작품 47과 112>
4번은 1930년도의 작품 47 초판과 1947년 개작판 작품 112의 두 종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연주도 양쪽으로 나눠 집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마르티논은 초판 작품 47로 연주했고 오자와, 웰러 그리고 로제스트벤스키 등은 개작판 작품 112로 연주했으며 로스트로포비치와 예르비는 초판, 개작판을 모두 시도 했지요. 사연 많은 3번을 완성하고 곧바로 프로코피에프는 3번과 비슷한 의도로, 당시 꽤 성공적이었던 발레곡인 “The Prodigal Son (방탕아)”를 모토로 1929년 4번의 초판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코피에프의 기대와는 다르게 1930년 11월의 초연 실패 후 감정 이입을 재구상하게 되고 마침내 곡에 서사적인 분위기 묘사 삽입을 결심하고 대수술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 따라 초판에 담긴 미묘한 감정의 방황의 흔적을 지우고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게 되는데요. 완전히 다른 곡이 되어 버립니다. 1악장의 경우 곡의 길이는 물론 내용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도입부의 변화는 여타의 악장과의 연결을 고려할 때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악장과 3악장도 대수술이 불가피해졌고 당연히 피날레는 1악장과 연계하여 확실하게 답을 하고 코다를 마무리 짓습니다. 개작판의 내용이 늘어난 폭만큼 사실을 드러내는 묘사에 주안을 두고 있다면 초판은 또한 그 나름대로 듣는 사람에게 많은 여운을 남기는 수수께끼 같은 곡이기에 그 가치의 경중에 대한 판단은 듣는 사람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습니다.
* 최선
제임스 디프리스트/말뫼 심포니/BIS – 디프리스트의 열정이 잘 나타나있는 호연입니다. 현의 울림은 풍성하지만 결코 넘치지 않고 플루트의 소리는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완급 조절은 놀랍게 감성을 자극하며 주고 받는 음의 대비는 극한으로 이끌어 냅니다. 외칠 때는 외치고 속삭일 때는 귀가 가려울 만큼 나긋나긋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지요. BIS가 작심하고 만든 음반이기에 녹음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 차선
예르비/국립스코틀랜드/Chandos – 예르비 하면 떠오르는 분위기가 장중함의 무게입니다. 어떤 곡을 해석해도 음의 저변에 깔린 중심을 잃지않는 색깔을 드러내지요. 곡의 분위기와 그의 색깔이 잘 들어맞는다면 그의 탄탄하고 굳은 뿌리는 중심을 잘 잡아내어 흔들림없는 연주를 창출해 냅니다. 예르비의 클라이막스를 들어 보십시요. 과연 다른 어느 누가 그의 거친 숨결에 대적하겠습니까? 느린 악장의 피치카토는 또 어떻습니까? 굳은 살 깊게 박힌 손가락의 힘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예르비는 초판과 개작판을 모두 연주하고 있으므로 비교하며 듣는 즐거움도 주지요. Chandos의 녹음은 마치 예르비를 위한 것처럼 울림의 힘을 고스란히 전해 주어 아쉬움이 없습니다.
<교향곡 제 5번 B flat 장조, 작품 100>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러시아에서는 스탈린과 그를 추종하는 일부의 기득권은 이를 기념할만한 무엇인가를 남기기를 원했고 당시 러시아의 예술계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찬양일색의 작품들을 내놓은 쇼스타코비치의 전성기 이기도 하였지요. 이 곡 역시 승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다섯발의 축포를 뒤로하고 초연이 거행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지요. 그러나 정작 프로코피에프 자신은 이 5번의 의미를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누가 뭐라하든 자신의 길을 걷기를 갈망했던 프로코피에프에게 거칠 것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나 곡의 분위기는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그가 의도했든 아니면 그 반대라고 할 지라도 그 당시의 분위기와 그리 멀지 않은 듯 합니다.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한 웅장함이나 달궈진 유리 그릇에 찬물을 끼얹어 쫙 갈라지게 만드는 섬뜩함도 보여주니 말이지요. 물론 승전을 표제로 나타내거나 “선전용 음악” 처럼 직설적인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그의 노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곡이 쓰여진 해인 1944년의 또 다른 그의 작품 발레 “신데렐라”를 떠올리게 만드는 2악장 알레그로 마르카토를 보십시요. 밝게 노래하다가 늘어지는 현의 선율, 이내 다가서는 먹구름의 그림자,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역설을 이런 변주로 훌륭히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 최선
얀손스/레닌그라드필/Chandos – “얼음 손” 얀손스가 만들어 내는 프레이징은, 이후 Chandos에서 오슬로 필과 기획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얀손스의 차이코프스키 해석은 이미 제가 소개해 드린 바 있는데 특히 2번과 6번 “비창”이 주목할 만 하지요. 이 프로코피에프 음반은 1987년도 실황 녹음인데 믿기지 않을만큼 녹음 상태가 좋고 질주하는 속도감이 압권입니다. 기름기를 쫙 빼고 울리는 1악장의 팡파르가 긴장하게 만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슴 벅찬 피날레로 치닫고 있습니다. 간결함을 속도로 조절하는 얀손스의 시도는 주목할만 합니다만 약간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빠른 연주가 아닌가 합니다. 또 다른 레닌그라드필의 녹음은 1971년 런던의 로열 엘버트 홀에서 실황으로 로제스트벤스키가 남긴 음반도 있는데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진한 감동을 주는 연주로 기억하고 있으며 1968년도 므라빈스키와의 협연반은 녹음 탓인지 음이 뻗지를 않고 날카롭게만 들려 추천하고 싶지 않군요.
* 차선
1) 카라얀/베를린필/DG – 카라얀의 프로코피에프는 안정속에서 간결함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5번의 최고 반열에 올라있는 이 음반은 곡의 성격은 접어두더라도 다소 억지로 저음을 약화시키고 현악기들의 음을 돌출시켜 녹음으로 곡의 음산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EMI시절의 카라얀 녹음에서는 볼 수 없는 시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5번은 명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균형 잡힌 완급 조절은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역시 베를린필을 이끌고 연주한 오자와는 빠를 때는 너무 빠르고 느릴 때는 너무 느려서 유기적인 흐름을 잇지 못하고 있기에 카라얀의 해석이 더 돋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이 당시 DG의 다소 더부룩한 녹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 테오도르 쿠차르/국립 우크라이나 심포니/Naxos – 쿠차르의 1악장을 들어 보십시요. 느리게 다가서는 잿빛 구름의 음산함 같습니다. 이토록 리얼하게 다가서는 1악장 해석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쿠차르의 의도는 음악을 듣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느린 악장에서는 신기하게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쿠차르의 연주는 듣고 또 들어도 자꾸만 미궁에 빠져드는 신비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Naxos의 녹음이 쿠차르의 어두운 그림자를 자꾸만 옅게 하려 들어서 불만입니다.
3) 조지셀/클리블랜드/Sony (CD복각) – 셀의 1959년도 옛 녹음을 지나칠 수가 없군요. 셀은 우수 깊은 하나의 수채화를 클리블랜드라는 붓으로 손에 잡힐 듯 너무나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고독한 날개 짓에 눈물을 떨구는 새 한 마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향곡 제 6번 E flat 단조, 작품 111>
1923년부터 파리에 정착하며 많은 작품으로 유명세를 타던 프로코피에프는 1927년 일시 고국을 방문하고 귀소본능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후 1932년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움의 객원 교수직을 맡게 되는데 결국 1934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것을 결심하고 1936년 그의 가족과 함께 영구 귀국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국의 상황은 그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6번이 작곡된 1948년에는 쇼스타코비치를 선두로 그 당시 조국에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음악가나 평론가들에 의해 그들 기준에서는 “이단아”였던 프로코피에프를 깎아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즉 스탈린의 각본대로가 아니라면 최소한 그의 입맛에 맞는 “형식주의”에 입각한 음악만이 최고라고 우기는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6번은 그 당시 조국의 비평가들에 의해 난도질 당했던 이유가 그대로 나타나있는데, 곡 속에 녹아있는 난해한 선율에서 읽을 수 있는 슬픔은 선을 그어 놓고 갖다대는 잣대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지요.
* 최선
예르비/국립스코틀랜드/Chandos – 예르비가 프로코피에프에도 통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명연인데 그의 의욕적인 프로코피에프 교향곡 전집에서 이 6번이 가장 뛰어난 해석으로 보입니다. 구석구석 챙기는 그의 노력과 더불어 스코틀랜드의 합주가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군데군데 “베를린필 이었으면…”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는 하지요. 스코틀랜드의 현은 아주 정확하게 파고 듭니다만 베를린필의 “두께”는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구성은 예르비답게 나무랄 데 없구요. 특히 3악장에서 보여주는 위트는 매혹적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제가 내심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협연반을 최고로 꼽고 싶었는데 음질도 그러하거니와 예르비의 해석도 정점에 닿아 있으므로 미련없이 예르비의 음반을 최선으로 꼽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르비가 꿩대신 닭은 결코 아닙니다.
* 차선
슬래트킨/내셔널심포니/RCA – 프로코피에프의 간결함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찾아 풀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닌 듯 합니다. 한쪽을 향해 뛰어가다가 갑자기 숨어버리고 또한 예상치 않은 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프로코피에프의 숨바꼭질 장난에 놀아나다 보면 길을 잃기가 십상이지요. 즉 이러한 프로코피에프 작품의 특성상 전체적인 구도가 정확히 그려지지 않으면 갑자기 어느 한 구석에서 쉽게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슬래트킨이 보여주는 해석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곡 전체의 균형을 끝까지 잘 지키고 있으며 긴장하며 듣게 만드는 흠잡을 데 없는 녹음도 이 음반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교향곡 제 7번 C sharp 단조, 작품 131>
1952년, 그동안 그렇게 프로코피에프와 반목하던 쇼스타코비치가 이 7번을 두고는 “완벽한 걸작”이라고 칭찬하고 프로코피에프의 사후인 1957년에는 러시아 예술가의 최고 영예인 “스탈린 상”을 다름아닌 쇼스타코비치의 추천으로 수상하게 되니 이 7번의 의미는 그만큼 각별합니다. 사실 고전주의 형식에 프로코피에프 만큼 현대적 감성을 잘 불어넣은 작곡가가 또 있을까요?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기 꼭 3시간 전에 프로코피에프는 한 많은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지하에서나마 고국으로 돌아온 보람을 찾은 셈이지요.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를 햇살로 지우려 하고 감정의 폭을 한없는 여운으로 남기고 있는 그의 역설적인 시도는 이후 그의 작품을 듣는 우리들에게 의미있는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 최선
아쉬케나지/클리블랜드/Decca – 아쉬케나지의 해석은 협연 악단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색깔 변화의 폭이 심한 편입니다. 필하모니아와의 훌륭한 협연을 보여주었던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생각을 나게 하는 프로코피에프의 7번입니다. 사실 7번은 음반 선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연주자의 개성이 이렇게까지 나타나는 작품은 드물거든요. 결국 곡자체가 여러가지 색깔을 갖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르비가 보여주는 심지 깊은 연주를 더 높이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아쉬케나지의 7번은 클리블랜드라는 미국적 컬러의 대표와 만든 또 다른 맛있는 연주의 기쁨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습니까? 악기별 개성은 잘 드러나 있구요 아쉬케나지가 꼼꼼하게 이끄는 프레이징도 일품입니다.
* 차선
니콜라이 말코/필하모니아/EMI – 말코의 1955년 옛날 녹음을 조심스레 꼽아 보았습니다. 로제스트벤스키의 해석에서 조금 더 입김을 불어 따뜻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웰러의 경직함에 유연성을 가미한 것 같기도 한 그의 프로코피에프의 7번은 한마디로 인간미가 넘칩니다. 옛 녹음이지만 EMI의 초창기 스테레오 기술을 등에 업고 연주의 섬세함도 잘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식 디테일이 아니라 아날로그식 담백한 음향의 뒷받침이기에 결코 서두르지 않는 그의 템포는 더욱 가치를 더해서 7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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