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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귀다!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 오후 대한일보 빌딩에서 중앙일보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약간은 쌀쌀하고 낙엽은 뒹굴고 가슴은 웬지 허전한데….
어디 선가 라트라비아타의 소프라노가 너무나 청아하고 맑고 힘차게 들려왔다.
이렇게 좋은 소리도 있구나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30분 이상을 은행나무에 기대어 음악 감상을 하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 소리는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 설치된 아주 구형 인켈 시스템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밖에다 내놓은 이 스피커는 비바람에 젖어 모서리 부분이 벌어지고 깨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다.
더구나 턴테이블도 너무 낡았고 바늘도 싸구려였다.
어떻게 저런 시스템에서 이렇게 좋은 소리가 날까?
정말 내 귀가 막귀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웠다.
소리 장사한 지 십 수년이 되었는데…
그 소리도 구분 못하고 내가 보유한 몇 천만원짜리 오디오보다 좋은 것 같았다.
장소와 시간, 그 때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소리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는 걸 실감했다.
또 한번은 대단히 추운 겨울날 술에 절여 아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택시를 탔다.
차 안에서 피셔 디스카우의 겨울나그네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아는지 내 기분에 딱 맞는 음악이였다.
기사 분께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서 어떻게 피셔 디스카우를 아느냐고 의아해 한다.
나도 음악을 좋아한다고 볼륨을 좀 크게 올려달라고 했더니 그 기사분도 대단히 좋아했다.
정말 그 때의 목소리며 배경에 깔리는 피아노는 아주 일품이였다.
집에 도착할 무렵엔 피로가 확 풀리는 것같았다.
괜히 내리기가 싫어 좀 더 드라이브나 하며 이삼십 분은 더 들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카오디오는 원래 차에 따라 나온 것이라고 한다.
몇 천만원짜리 카오디오를 설치했다고 자랑하는 차도 여러 번 타보고 음악을 들었으나
그 택시만큼 좋은 소리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역시 내 귀는 막귀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름 휴가 끝나 갈 무렵 일행 모두 바닷가로 나가고 혼자만 민박집에서 선풍기 앞에 앉아 시원한 수박
몇 조각 먹으면서 아주 여유롭게 딩굴고 있었다. 더운 바닷가에는 왜 가느냐고 일행들을 비웃어가며…
그런데 우리방 맞은 편 주인집 방에서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나도 같이 음악 좀 듣자며 크게 틀어달라고 부탁했더니 금새 크게 흘러나온다.
4악장의 클라이막스 웅장한 부분과 종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매일 몇 시간씩 음악을 틀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보니 음악이 싫을 때도 많았지만
4일 동안 음악을 굶었으니…
그 때의 시스템은 태광 미니콤포넌트였다.
음악이 고프니 싼 기계에서도 정말 좋은 소리가 나는 걸 실감했다.
역시 내 귀는 치유불능의 막귀다.^^
평상 시엔 음질이 나쁘네, 음장감이 없네, 위상이 안맞네하며 음악을 듣는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의 장소에서 그것도 싼 기계에서도 감동을 받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그러한 경험이 없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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