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도 21세기가 10년도 더 지난 지금 시점에서 한번쯤 써봤으면 하는 오디오 제품 중에
마란츠 7과 8B, 9 등을 꼽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거의 반세기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는 기기는 거의 없는 만큼,
역으로 이번에 받아본 제품에서 그런 화려한 영광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혹 지난 호를 받아본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켄 이시와타라는 분을 만났다.
이 분의 공식 직함은 브랜드 대사(Embassador)이다.
대체 무슨 직함이 이러냐 물을 법한데, 거기엔 참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일단 브랜드 홍보가 주목적이지만, 제품 개발에도 관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진하기도 하며,
브랜드의 대변인 역할도 한다.
그러므로 그가 1978년에 마란츠 유럽에 온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직함을 유지하며 일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무엇보다도 마란츠의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지켜간 부분이 인정받는데,
그것은 창업자 소울 마란츠의 정신을 최대한 살려가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마디로 마란츠의 역사는 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요약되며, 특히 1982년 CD의 탄생 이후는
전적으로 켄의 마란츠라 해도 좋으리라.
한데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일반 애호가들을 위해 PM 6004 인티 앰프와 CD 6004 CD 플레이어를
각각 추천했다. 비록 가격은 저렴해도 그 음을 들으면 상당히 좋아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름대로 궁금하던 차에 이번에 PM 6004를 만났으니,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고 하겠다.
사실 본기는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보급기다.
따라서 외관이나 만듦새가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부분이 없지 않다.
당연히 음도 그저 그런 수준이겠거니 지레짐작할 수 있다. 한데 나는 이미 켄과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좀 아는지라 뭔가 다르긴 다르겠거니 기대한 부분도 있다.
성급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충분히 예상에 들어맞는, 어떤 면에서 조금은 상회하는 음이다.
가격대비 성능이란 면에서 상당한 경쟁력이 있는 제품인 것이다.
일단 외관부터 보자. 커다란 노브가 양쪽에 배치된 가운데, 중앙에 표시창이 옆으로 길게 나 있다.
그 밑으로 몇 개의 버튼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띠는 것은 바로 다기능.
무엇보다 포노단이 지원되는 바, 이로써 MM형 카트리지의 경우 별도의 장치 없이 LP를 들을 수 있다.
MC의 경우, 승압 트랜스 정도를 걸어주면 훌륭한 음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이래서 총 6개의 입력단이 제공된다. 여기엔 소스 다이렉트 기능이 있어서,
본기를 AV 시스템과 연계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잠깐, 유심히 살펴보니 라우드니스 기능이 눈에 들어온다. 참 반갑다.
거기에 트레블 및 베이스 조절 버튼도 있다. 확실히 옛 생각이 난다.
사실 오디오를 만지다 보면 소스에 따라 또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조작하고 싶은 욕구가 일 때가 있다.
그런 재미가 듬뿍 담긴 모델이다.

스피커 단자도 두 쌍이나 제공되어, A와 B 중에서 선택할 수도 있고, 두 개를 동시에 울릴 수도 있다.
이 경우 바이 와이어링 접속이 된다.
그런데 이 제품은 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던 PM 6003의 후속기다.
그 제품의 경우, 왓 하이파이나 오디오 앤 비전과 같은 잡지에서 상을 준 바도 있다.
아무래도 본기 제작에 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음질 위주의 개선을 과감히 시도한 바,
그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우선 언급할 것이 프리 및 파워부를 완전히 독립시킨 것이다.
상당한 물량 투입형 인티 앰프가 아니면 불가능한 대목인데, 이 부분에서 만족스런 성과를 얻고 있다.
당연히 음질 위주로 신호 경로를 최대한 짧게 한 점이나 디스크리트 회로를 채용해서
오디오 그레이드의 부품들을 선별 배치한 점 등은 과연 마란츠라는 이름에 걸맞는 투자다.
그런데 더 중요한 덕목이 있는 바, 바로 전원부에 대한 배려다.
우선 특별히 제작한 전원 트랜스포머를 배치한 가운데, 압출 성형으로 제작된 히트 싱크를 부착했다.
출력단을 보면 이 가격대의 앰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IC가 아니라 고급 TR이 투입되었다.
얼마나 음에 투철한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 마디로 다기능과 고음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포획하는 데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본기는 밑으로 PM 5004를 두고, 위로는 PM 7004를 뒀다. 5004, 6004, 70004 순으로 출력을 말하면
8오옴에 40W, 45W 그리고 70W를 제공한다.
그런데 본기의 경우 대응하는 주파수 대역폭이 밑으로 10Hz 위로는 70KHz에 이르는 만큼,
앰프는 가청주파수 대역을 훨씬 뛰어넘는 광대역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
켄의 생각이 뚜렷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소리에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실 본 기는 그리 크지 않고, 출력도 높지 않아 잘못된 선입견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음질에 이르면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이 없을 정도로 양호하다.
특히 밸런스 감각이 좋아, 고역~중역~저역에 이르는 부분에서 별다른 파탄이 없고 또 과장도 없다.
또 음 자체가 곱고 섬세해서, 이쪽에서는 그냥 조용히 음에 파묻히면 된다.
참고로 본기에 곁들여 나오는 리모콘의 경우 마란츠의 다른 제품에도 연동한다.
동사의 CD 플레이어나 튜너 등을 구입한다면, 훨씬 편하게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다.
이번 시청을 위해 스피커는 포크 오디오의 RTi A5, CDP는 프로시드의 PCM 2를 각각 사용했다.
우선 조 수미의 <도나 도나>를 듣는다. 확실히 곱고 섬세하다.
이보다 몇 배나 하는 제품에서나 느낄 수 있는 고급스러움이다.
베이스의 울림도 적당하고, 클라리넷의 환각적인 음향도 잘 살아 있다.
조 수미가 발성할 때의 엑센트나 숨소리 등이 정교하게 포착되어 숨을 죽이고 듣게 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D959는 어떤가? 브렌델의 80년대 필립스 녹음으로,
상당히 정교한 마이크 세팅이 특징인 바, 그 미덕이 골고루 나온다.
섬세하고 유려하며 배음과 잔향이 잘 섞여서 듣기에 편하다.
중간에 강하게 임팩트를 줄 때의 압박감 또한 일품이다.
마지막으로 마일스 데이비스의 <라운드 어바웃 미드나이트>. 칠흑과 같은 어둠에서
불쑥 트럼펫이 불거져 나온 듯한 느낌이 잘 살아 있다. 뮤트를 썼지만 절대로 거칠거나 쏘지 않는다.
마일스 특유의 섬세하면서 깊이 있는 음이 술술 나온다.
중간에 콜트레인에 이르면 호방하면서 기교가 충만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데,
확실히 이 대목에서 화려했던 마란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확실히 전통은 무시할 수 없고, 이 작은 기기에도 그런 면에 담겨져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글.이종학/2012.1 Hifi-Choice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