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디오계의 백전노장 럭스만(Luxman)
일본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도시 전반에 흐르는 재즈의 분위기다.
낡은 카페나 클럽이 의외로 많고, LP로 지글거리며 듣는 모던 재즈(일본에서는 던모라고 한다)
의 매력은 진한 커피나 일본산 맥주와 더불어 뭔가 가슴 한구석이 저리는 듯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도쿄든 오사카든 외관만 보면 한국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런 곳에 오면 확실히 한국과
다르구나 실감한다.
참고로 필자는 일본산 맥주로 예비스를 제일 좋아한다. 순 100% 맥아로 만든 것인데, 유럽의
진한 맛과 향이 일본의 부드러운 입맛과 적절히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뒤끝이 좋다.
럭스만의 음에 이런 맛이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필자만의 착각일까?
최근에 럭스만에서
SQ-38u를 출시했다.
EL34를 써서 채널당 30W를 내는 인티앰프로, 아마 외관을 보면 과거의 냄새가 물씬
풍길 것이다.
그리고 이 제품의 역사를 모르는 분들은 그냥 인티앰프 하나 나왔거니 넘기겠지만,
일본에서는 다르다. 아, 저 녀석이 아직도 나오는구나, 반갑게 미소 지을 아저씨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JBL이나 탄노이 스피커와 연결해서 열심히 음악을 듣던 젊은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말하자면 이 물건은 그냥 제품이 아니다.
전설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조금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SQ-38u의 외관이 어딘지 과거 마란츠와 닮았다고
느낄 것이다.
뭐,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마란츠 7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오디오가 어디 있겠냐마는,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마란츠 세트는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나 부자가 아니면 꿈도 못 꿀 제품이었다.
그런 콘셉트나 설계 방침을 응용해서 현실적인 가격으로 내놓은 것이 38 시리즈였고,
당연히 6~7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산수이에서 내놓은 통에 JBL 유닛을 넣은 다음 가라드 턴테이블과 연결해서 듣는
38 시리즈는 열락의 세계 그 자체다.
이후 1995년에 시그너처 버전이 나와 한 차례 복각이 된 후, 이번에 다시 나온 것이다.
참 끈질긴 생명력이다.
럭스만을 소개하면서 장황하게 38 시리즈를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1925년에 창업해서 지금까지 8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럭스만이 순전히 찬란한 영광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가 남에게 팔린 적도 있었고, 한동안 신제품이 나오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런 영욕의 세월 속에서 꿋꿋하게 ‘아직도 럭스만이 살아 있네!’라고 팬들이 반기는
제품이 바로 38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럭스만의 긴 역사에서 최초의 분기점은 1984년에 왔다.
그간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로 성가를 올리던 이 회사가 알파인에 팔려버렸기 때문이다.
알파인은 이 회사를 야마하와 경쟁시키기 원해서 저가의 제품을 양산했다.
미국의 코스트코나 영국의 리치 사운드와 같은 대형 마트를 겨냥한 전략이었다.
덕분에 브랜드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었고, 실적 또한 변변치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삼성이 잠깐 손을 댔다.
이 시기에 영어 가능한 일본인 전문가 팀이며 설계 팀 모두가 회사를 떠났다.
거의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일본의 부유한 사업가가 지분을 다시 인수한 후, 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유능한 엔지니어인 하시모토가 개입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18년간이나 공을 들여 제작한 앰프가 빛을 보기를 원했으므로, 럭스만의
부활과 일치되는 점이 많았다.
결국 2005년, 창업 80주년을 기해서 대대적으로 신제품이 런칭되었고, 이후 2007년에
미국 시장에 다시 진출하면서 전 세계에 럭스만의 부활을 알린 것이다.
참 다사다난한 시절을 거쳐, 과거의 명 엔지니어들이 상당수 복귀한 가운데, 본격파
하이엔드 메이커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럭스만이 휘청거릴 때 사표를 내고 자기 회사를 차린 이들이 많다.
에어 타이트를 만든 아츠시 미우라와 마사미 이시구로는 널리 알려진 경우이고, 레벤의
타쿠 히오도 역시 이곳 출신이다.
70년대에 럭스만에 근무하면서 앰프 개발에 참여한 팀 파라비치니는 나중에 독립해서
영국에서 E.A.R.(Esoteric Audio Research)를 만들었다.
오디오 사에서 럭스만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여기서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번에 필자는 부활한 럭스만의 신제품 대부분을 들어볼 기회를 잡았다.
사실 일본산 오디오 메이커 중에는 어큐페이즈, 에소테릭, 익스클루시브 등 실력파 앰프
메이커들이 상당하다.
가끔 소니나 야마하에서도 플래그십 모델이 나온다.
한 마디로 경쟁이 치열하고, 당연히 음색이나 컬러 모두 다르다.
이번에 럭스만을 집중적으로 들으면서 이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시청한 제품들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각각의 내용은 이렇다.
1) 미니 오디오 세트 : S-N100 스피커, D-N100 CD 플레이어, SQ-N100 진공관 인티앰프
2) SACD 플레이어 : D-06 및 D-08
3) 인티앰프 : L-550AⅡ 및 L-590AⅡ
4) 분리형 : C-800f 프리앰프 및 M-800A 파워 앰프
우선 첫번째 시스템부터 소개하면 이렇다.
처음에는 미니 오디오 컴포넌트 정도로 생각하고 세팅을 했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척이나 당당하고, 시원스런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얀센이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보자.
음에 활기가 넘치면서 또 예쁘게 다가온다. 오케스트라의 움직임도 일목요연하게 잡히면서
바이올린과 주고받는 대목이 정교하게 포착된다.
전체적으로 온화하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이어서, 여성 연주자의 톤이나 개성과 잘 맞는
느낌이다.
이어서 게이코 리의 ‘Night and Day’를 들었는데, 바닥을 칠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중량감 있게 뻗는 더블 베이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목소리도 예쁘게만 꾸미지 않고, 약간 거칠면서 허스키한 느낌도 잡아낸다. 눈을 감으면
일반적인 인티앰프에 좀 큼지막한 북셀프로 재생되는 스케일이 상상된다.
오랜만에 접하는 럭스만에 단단히 한 방 먹고 말았다.
두 번째 세팅은 인티앰프 두 종에 D-06을 묶어서 PMC TB2i와 연결된 음이다.
참고로 현재 럭스만에서 생산되는 인티앰프는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번에 들은 A시리즈로, 여기서 A는 클래스A 설계를 뜻한다.
550의 경우 20W, 590의 경우 30W의 출력을 낸다.
이 덩치에 겨우 2~30W라는 사실에 좀 놀라겠지만, 그만큼 충실하게 설계했다고 판단하면 된다.
또 이럴 경우 스피커 구동력도 100W 이상이 된다고 믿어도 좋을 듯싶다. 한편 505u, 509u 등
이른바 u 시리즈가 있는데, 이는 AB클래스 설계. 각각 8Ω에 100W 및 120W의 출력을 낸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550과 590의 관계. 불과 10W의 출력 차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후자가 전자보다 50% 이상 출력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하지만 TB2i나 나중에 3웨이 톨보이로 제작된 OB1i 등과 연결해도, 양쪽 다 무리 없이
구동한다.
또한 음의 결이나 순도가 높아서, 통상의 인티앰프에서 얻기 힘든 고품위한 느낌은 특필할
만한 대목.
일단 TB2i만 놓고 봐도 흥미로운 것은, 이 작은 녀석이 그려내는 양감이 좋은 저역이다.
앰프가 힘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 바닥까지 뻗을 수 없다.
얀센의 경우, 오케스트라의 사이즈나 움직임이 기세 좋게 다가오고, 게이코 리는
더블 베이스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시험 삼아 레드 제플린의 ‘D'yer Mak'er’를 걸었는데, 좀 과장하면 천둥이 치는 듯한
존 보냄의 드럼에 K.O.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애걔, 출력이 이것밖에 안 돼’라고 처음부터 단정 지으면 큰 코 다친다는
이야기다.
4~5평의 방에 북셀프를 들인다고 하면, 550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분리형으로 넘어가자.
일단 만듦새나 가격이 만만치 않다.
부활한 럭스만의 실력을 본격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다.
참고로 M-800A는, A라는 형번이 말해주듯 클래스A 설계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큰 덩치에 출력은 60W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옴수가 내려갈 때마다 정확히 반응해 1Ω일 경우 놀랍게도 480W를 그대로 낸다.
잘 알겠지만 4Ω이다, 8Ω이다 하는 스피커들도 음악에 따라 조금씩 옴수가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에 정확히 대응하면, 사실 출력의 크기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정공법대로
타협하지 않고 만든 파워 앰프인 것이다.
한편 프리앰프로 말하면, 비교를 위해 두어 가지 다른 메이커의 음을 들어본 다음, 이런
느낌을 받았다.
상당히 온화하고, 절제된 음이지만 결코 유약하거나 흐릿하지 않다.
말하자면 기본적인 해상력이나 다이내믹스를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공격적이거나 귀를
아프게 하지 않는 음인 것이다.
뭐, 이렇게 쓰면 쉽지만, 실제 음을 들어보면 상당히 내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0년의 세월을 그냥 보낸 것이 아니리라.
이 세트의 음을 듣기 위해 SACD 플레이어는 D-08로 그레이드를 올리고, 스피커는 PMC의
OB1i를 사용했다.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음의 차원이 다르다.
D-08이 그려내는 치밀하면서도 밸런스가 좋은 음을 앰프에서 가감 없이 증폭해 스피커를
울리는 구조인데, 일단 놀란 것은 저역이다.
일체 흐릿하거나 오버하지 않고,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가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즉, 오케스트라가 총주하거나 재즈 캄보가 몰아칠 때는 바닥을 치듯이 쏟아지지만, 나직이
속삭이듯 연주하거나 조용히 솔로가 나올 때엔 주위가 적막강산, 음 하나하나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한다.
참 대단한 재주다.
여기서 들은 폴리니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 그가 직접 비엔나 필을 지휘하고
또 피아노를 치는 연주인데, 유리알처럼 영롱한 피아노를 만날 수 있다.
일체 힘을 빼고 리드미컬하게 치는 부분이 절묘하게 다가오고, 중간중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곡의 흐름을 꽉 움켜쥔 모습도 보기 좋다.
심하게 말하면, 폴리니가 즉흥 연주를 하는 듯 일체 무리가 없는 연주다.
그런 부분이 실키하고 또 아름답게 그려진다.
게이코 리. 악단이 정확히 자리를 지키고, 베이스부터 피아노, 트럼펫 등 개개 악기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보컬로 말하면 일체 꾸밈이 없이 적절히 허스키하고 또 적절히 섹시한 음이 나오다가,
찰랑거리는 심벌즈가 그려내는 리듬감을 생각하면, 재즈 클럽이 따로 없다.
이런 음을 듣다 보면, 과연 어깨에 힘을 빼고 동작하면서도 힘을 줄 때엔 정확히 주는
무술 고수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참 능수능란하면서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젊고 싱싱하고 생기발랄한 표정이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노련하게 아우르는 모습에서,
역시 럭스만은 다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오래 전부터 간간이 제품을 접한 럭스만이지만, 이번에 그 실력을 점검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